포닥 9개월

델프트 공대에서 포닥을 시작한지 9개월이 지났다.

작년 8월 Leading fellows 프로그램 (2년) 으로 계약이 갱신되면서 공식적으로는 7개월이 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9개월?

놀라운 숫자다. 생각보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는 적응기로 생각하여 아주 여유롭게 보냈다. 그러나 2019년으로 접어들면서는 여유가 많이 사라졌다. 본격적인 테이프 아웃 (tape-out) 일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테이프 아웃은 칩 제작시 설계자가 최종 설계 도면을 생산업체 (파운드리)에 전달하기까지의 과정이다.

하지만 일상 패턴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저녁 퇴근을 해서 주하 목욕, 저녁식사, 주하 재우기가 끝나면 2-3시간 일을 더하는 정도이다. 그것도 피곤해서 이틀 중 한번 꼴로 하는 듯하다.

원래는 영어 공부, 독서, 운동, 넷플릭스 시청, 글쓰기 심지어 요리까지 다양한 취미 활동을 계획중이었으나 하나씩 포기하게 되었다. 물론 주말에는 나들이도 충분히 하고 있으며, 주중 한번씩은 친교 시간도 가질 수도 있다. 그냥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다로 말하는 것이 옳은 듯 하다.

이곳에서의 연구 환경은 한국보다 나은 점이 많다. 가장 큰 장점은 예정된 미팅을 제외하면 매일의 일과를 온전히 내가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팅 또한 효율적이며, 새롭게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비록 학교에 상주하는 시간은 짧지만,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한국의 대학원 또는 회사보다 1.5배 이상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좋은 환경이어도 걱정이나 고민은 있기 마련이다.

이곳에서의 연구 활동 중 나에게 힘들게 느껴진 것은 다음 두가지이다.

  • 프로젝트에서 처음 맡겨진 내 역할의 성격
  • 스스로의 연구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오는 좌절

나는 현재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 합류한 것이 아니라 마무리 단계에 합류하였다. 이미 첫번째 칩이 제작되어 논문으로 발표가 되었으며, 목표한 시스템의 최종 완성을 위해 추가 측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프로젝트의 중간 지점에 합류한 나에게는 두가지 역할이 주어졌다.

  • 측정에서 발견된 문제점의 해결책을 찾아 두번째 칩에 적용하는 것
  • 부족했던 성능을 개선하여 완성도 높은 두번째 칩을 설계하는 것

이를 통해 프로젝트의 최종목표를 달성하고 동시에 이어질 새로운 프로젝트의 좋은 시작점을 만드는 것이다.

큰 그림을 그리는 나의 지도교수 (이하 미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세울 수 있는 계획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역할이 논문을 쓰고 싶은 나의 입장에서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난 왜 논문을 쓰고 싶지? 는 또 다른 질문으로 남겨두자.) 첫번째 칩이 이미 좋은 논문에 발표가 되었고, 두번째 칩은 완성도를 높이되 리스크는 최소화해야 했다. 따라서 큰 변화는 지양해야했고, 이것은 두번째 칩의 독창성을 확보하는 것에 제약이 되었다.

개인미팅에서 미힐이 말해준 적이 있는데 이번 프로젝트의 설계를 가능한 빨리 마무리하고, 2019년에는 도전적인 다음 일을 시작하는 것 이 나에 대한 자신의 계획이었다고 한다.

미힐의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독창성이 없는 칩, 즉 논문의 가능성이 낮은 칩을 만드는 것은 내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물론 논문이 아니더라도 그 일을 통해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많겠지만 이곳에 있는 본질적 이유가 논문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은 걸리더라도 첫번째 칩과 차별화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계속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미힐과 논의하면서 반영될 수 있도록 설득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어디를 가든 자신의 지도교수나 상사를 설득하는 것이 시작임은 변함이 없다.

결론적으로 미힐의 관심을 끌만한 새로운 아이디어는 제안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프로젝트의 상황이 새로운 접근에 대해 매우 보수적어었던 이유도 있고, 또는 내가 매력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다.

새해가 되어서는 그런 노력을 접어두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방향에만 더 집중하여 일을 수행했다. 오히려 문제 해결과 성능 개선에 중점을 두고 설계를 진행하고 나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논문으로서의 주장을 해볼만한 결과물이 되어가는 듯하다. 물론 내가 리뷰어 (논문 채택 여부를 판단하는 심사위원) 도 아니지만, 쓰는 것은 내가 하니까.

어찌되었든 칩이 설계한대로 측정이 된다면 나는 논문을 작성할 것이고, 최근 미힐 또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했다. 이 칩이 첫번째 버전과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관건이며, 어디에 중점을 두고 주장 할 것인지에 대한 스토리 라인이 필요하다.

다른 어려움은 스스로의 역량에 대한 불확신에서 오는 좌절이다.

이것은 나의 대단히 나쁜 습관 중 하나인데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 특히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나도 모르게 그 타이틀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 전혀 그럴 필요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박사인데 왜 이걸 몰랐지 또는 왜 이렇게 밖에 생각을 못했지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무엇을 많이 아는 사람이 박사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말이다. 타이틀이라는 것은 정말 1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현재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 훨씬 중요할 것이다. 미힐과의 개인 미팅 시간은 나에게 아주 유익하다. 매시간 그는 나에게 부족했던 회로설계/초음파의 배경이론 뿐만 아니라 내가 설계한 회로 그리고 시뮬레이션/측정 결과에 대해 종합적 분석이 담긴 그래프를 화이트보드에 그리면서 설명해준다. 미팅 후 화이트보드 사진 촬영은 필수이다.

또한 나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회로설계 엔지니어로서의 중요한 자세를 지적해주었다.

  • Before you simulate, ask yourself what you expect
  • Be paranoid!

절대 무턱대고 시뮬레이션을 수행하지 말고, 이 시뮬레이션에서 내가 어떤 결과를 얻을지 미리 예상해야한다. 그리고 예상과 다른 결과가 있다면 그것이 설령 관심 밖의 중요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반드시 확인하고 설명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하면 이런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 아는만큼 예상한다 (?)

그러나 분명 지금보다 더 ‘생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매우 추상적으로 시뮬레이션 결과를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었다. 정확한 설명이 안되는데 대충 이런 것 때문에 그렇겠지? 그래도 내가 목표한 수치는 얻었으니까 문제없어! 하고 지나간 것이 많다. 지금까지는 어떤 식으로 지나왔든 간에 미히일과의 미팅에서는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나의 모습에 자책할 때도 많았다.

나의 인생에서 미히일과의 만남은 아주 의미있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매번의 미팅을 통해 그에게 많은 내용을 배우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부족했던 디테일들이 하나씩 채워지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박사과정에서 나는 꽤 넓은 범위에서 초음파 시스템을 이해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대부분의 이해는 블록다이어그램 수준에서 이루어졌고, 주요 논문의 아이디어들도 그런 맥락에서 구체화되었다. 시스템의 여러 회로를 모델링하거나, 두가지 기능을 하나의 회로에 구현하는 것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것도 분명 잘한 부분은 있지만, 디테일로 내려갈수록 많은 구멍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넓고 깊게 했다면 최고이겠지만 지금의 시간들이 그것들을 보완해 줄것이라고 믿는다.

감사의 말들은 더 시간이 흐른 후 전하기로 하며 일을 좀 더 하러 가야겠다!

4 Comments »

  1. 벌써 9개월이 지났어?
    세월 진짜 빠르네.
    세 세식구 잘 적응하고 건강하게 지내니 감사하다.

    연구 중간에 들어가서 적응하기도 바쁜데 완성도 높은 칲을 설계해야 했으니 많이 힘 들었겠다.
    서울대와 델프트 공대에서 연구하고 미팅하는게 분명 문화 차이가 있었을테니 말야.
    그래도 좋은(내 생각에는)지도교수 미히일을 만난것 같아서 기쁘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자신에 대해 좋은 점수를 안주지만 상대방은 알고 있지.
    그 사람이 얼마나 능력자인지.
    그러니 주하아빠도 여기까지 온걸 보면 훌륭해 아주 많~~~이~
    나는 늘 우리 사위 김서방이 최고라고 생각해.
    상황마다 성실함이 있으니 ‘김태훈’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드높이 알려질거라 믿어.

    김태훈,사랑해~
    허수정,사랑해~
    김주하,엄~~청 사랑해~

  2. 삶에서는 넘 자신 넘쳐도 좀그렇지만 역지사지로 넘소심하거나 겸손 모드도 위축되오니 적당히 자신감을 가지고 매사에 추진력도 겸비했으면 좋겠다 아빠가 보는 우리 아들 김박사님은 넘깊이 생각하다보니 역효과인듯 하는 생각이들어요 자신있게 또 열심히 지금처럼 해 나가면 멀잔아 좋은결과로 리더자로 자신의역활과 존재의 뜻을 펼쳐 나갈 거라믿는다 아들 김박사!!! 홧팅!!!!!
    그러고 옛소담에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천천히 가는듯 해도 그게 잘해나가는 길이요 이제 7개월차 매사에 성실히 임하는 우리 김태훈박사님 기도로 후원합니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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